근현대사 3권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 반란

여수 순천 사건

[별지 1] 여수 순천 사건의 주동자 김지회·홍순석 사살 장소(1948년 4월9일)
[별지 2]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의 아지트와 그의 최후(1953년 9월17일)
[별지 3]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사건 진압
[부 록] 민족 중흥의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 

여수 순천 사건은 제주 ·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 준비 중이던 여수 14연대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인사계 지창수 상사와 김지회 중위와 홍순석 중위의 주도로, 좌익 남로당원 50여 명과 여수 인민위원회 600여명이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 여수는 8일만에, 순천은 4일 만에 국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반란군과 그 동조하는 무리에게 여수에서 1,200명 양민과 순천에서 1,134명 양민이 학살 당하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

여수 순천 사건은 여수 14연대 안의 남로당원들이 일으킨 군 반란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1948.8.15.)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참혹하고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46년에는 1월 찬탁투쟁, 9월 총파업투쟁, 대구10월사건이 일어났고, 1947년에는 3·1절 기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48년에는 2·7사건, 제주4·3사건, 5.10단선단정 반대, 여수 순천 사건 등이 계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1950년에 한반도 역사상 최대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하고 말았습니다.

1948년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부에서는 대규모의 경비대와 경찰대의 병력을 투입하여 단시일 내에 공산세력들의 만행을 모조리 진압하려 하였으나, 남로당 세력이 군 내부에 뿌리깊이 잠입하여 있었으므로 진압은 장기화되었습니다. 4·3사건은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내었을 뿐 아니라, 김익렬의 뒤를 이어 제주 9연대장으로 파견되었던 박진경 대령이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제주 9연대 내의 남로당원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육군본부(이하 육본)에서는 제주 4·3사건을 진압할 목적으로 여수 14연대에 제주도 출동명령을 우편으로 하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극비 명령이 여수 우체국에 근무하던 남로당원에 의해 누설되어, 여수 14연대장 박승훈 중령보다 이재복(남로당 군사부 총책)과 이중업(남로당 중앙조직부 총책)이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남로당은 여수 14연대 내의 인사계 지창수 상사와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를 중심으로 한 50여 명의 남로당원들이 출동 당일에 사건을 일으킬 준비를 치밀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동(東)으로는 순천과 하동, 서(西)로는 벌교와 보성, 북(北)으로는 구례 일대를 휩쓸어, 시내의 관공서마다 인민공화국 포스터가 나붙고 붉은 인공기가 휘날렸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바뀐 듯했습니다. 여수와 순천 시내에서는 우익 단체와 경찰 그리고 그 가족들에 대한 살육과 난동이 약 7-10일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자비하게 자행되었습니다. 거리마다 집집마다, 우물이며 하수구, 논둑, 경찰서 등에 처참하게 죽은 시체가 나뒹굴고, 가는 곳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4연대 반란 진압 차 출동하려던 광주 4연대 반란, 대구 6연대 반란, 마산 15연대 반란 등이 연쇄적으로 이어졌고, 대한민국은 건국 2개월 만에 나라가 전복될 큰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을 제정(1948년 12월 1일 법령 통과)하였는데, 이때 군 내부에 거미줄처럼 침투해 있던 좌익 세력을 10,317명(숙청 4,749명 탈영 5,568명)이나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수 순천 사건은 6·25동란과 버금가는 공포의 사건이다.

여수 순천 사건을 가리켜 14연대 하사관 세력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봉기’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는데,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여수 순천 사건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여수 14연대 안의 남로당원들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군 반란이었습니다. 여수 인민위원회 소속 23명은 1948년 10월 19일 20시경에 14연대 정문 앞 식품점에서 기다렸다가, 성공했다는 연락을 받자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고 즉시 부대 안으로 들어가 함께 무장하고 가담했습니다. 이는 여수 남로당에서 지령을 내렸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14연대 반란군이 여수를 점령하면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경찰과 우익의 이사들과 그 가족들과 친척들이었습니다. 반란군 초기 사령관 지창수 상사가 “제주 출동에 앞서 악질 반동 경찰부터 타도하자. 지금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으니 모두 나를 따르라”고 연설한 내용에서 확인되듯, 경찰이 인민을 착취하고 통일을 저해하는 반동분자라는 이름하에 너무나 비참하게 처형되었고 그 시체들은 아무렇게나 버려졌습니다(각주: MBC방송 <이는 말할 수 있다>제 5회(1999.10.17.), “여수 14연대 반란”). 당시 여수(양민 1,200명 사망)와 순천(양민 1,134명 사망)에서 단시일 내에 수많은 생명이 저들 손에 들려진 신식 무기에 의해 무참히 살상되었는데도, 그것을 봉기라고 한다면 이는 역사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백성이라면 피비린내 나는 6·25동란과 그에 버금가는 공포의 여수 순천 사건을, 그 근본까지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해방 이후 김일성의 남한 적화 야욕과 박헌영의 지령대로 움직이는 남로당 세력 때문에 나라가 극한 혼돈 속에 빠진 것과,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살인을 밥 먹듯 자행했던 공산당의 소름끼치는 학살과 만행을 생생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실로 너무나 엄청난 대가와 희생이 지불된 역사적 진실과 그 교훈을 등한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날조된 역사는 필연코 우리와 후손들을 병들게 하여 나라의 장래를 암담하게 만든다.

통계조사 결과,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13-19세에서 62.9%, 20대에서 58.2%였고,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37.1%와 41.8%였습니다(조선일보 2010년 3월 26일자). 또한 초중고 학생의 40%가 3·1절이 무엇을 기념하는 날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경향신문 2010년 3월 1일자).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청소년들의 심각한 무지와 무관심, 그 때문에 모든 분야에서 쉽게 좌경화해 가는 것을 보면서, 부모 세대로서 어느 때보다 그 책임을 무겁게 통감하게 됩니다.

역사적 사실은 결코 시대 흐름에 따라 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해석에 있어 여러 의견이 나올 수는 있으나 실체적 진실까지 왜곡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강자(승자)편에서 역사적 진실 자체를 가감하거나 왜곡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역사는 더해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되며 정확한 사실이 그대로 밝혀져야 합니다. 그 순간에 역사는 현재 속에서 놀라운 생명력을 발휘하고, 현재를 곧게 비추어 주는 선명한 거울이 되며, 미래를 향해 올바른 방향을 힘차게 외치는 나팔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곡, 날조된 역사는 필연코 우리와 후손들을 나약하고 병들게 하여 나라의 장래를 암담하게 만듭니다. 과거 역사를 사실대로 진단하지 못한다면 앞을 못 보는 장님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국가(國家)란 만족의 커다란 집이다. 나라 국(國)에 집 가(家), 국가는 실로 민족 대식구가 모여 사는 영원하고 광대한 집입니다. 이 나라에 사는 백성들은 저마다 대한민국의 한 가족 한 식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라고 하는 것은 상황과 필요에 따라 입었다 벗었다 하는 옷가지 같은 것이 아니고, 절대로 떼어내 버릴 수 없는 내살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백성과 국가는 일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디 이 책을 읽는 대한민국 백성 모두가 뜨거운 민족혼으로 조국의 앞날을 늘 생각하고 염려하며, 나아가 일사각오(一死覺悟)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나라를 지키신 진실된 애국자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