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4권

1950년 6월 25일

잊을 수 없는 6·25 전쟁

[별지 1] 북한군의 불법 남침기(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별지 2] 6·25전쟁 단계별 전개도(1950.6.25~1953.7.27 : 3년 1개원 2일)
[별지 3] 낙동강 방어선(1950.8.4~9.15)
[별지 4]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별지 5] 유엔군의 북한지역 최대진출선(1950.10.25~12.3)
[별지 6] 중공군의 침투 경로 및 1·2차 공세(1950.10.25~12.3)
[별지 7] 흥남철수작전 일정과 철수 방향(1950.12.15~24).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당은 선전포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기습 남침을 감행하였다. 전쟁개시 불과 3일 만에 북한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고, 국군 6개 사단 4만 4천명이 전멸당했다. 6·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 밤 10시 휴전협정 되기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우리민족에게 가장 뼈아픈 냉전 시대의 비극이었다.

6·25전쟁은 북한 공산당이 선전 포고없이 무력으로 기습 남침한 전쟁이다.

해마다 6월은 우리 민족에게 아픔의 달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6월은 나라에서 호국 보훈의 달로 정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한 순국선열을 특별히 기념합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들이야말로 후손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아야 하고, 그 숭고한 뜻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6월 한 달만 호국 보훈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애국은 실천 없는 말잔치가 아니고, 역사인식을 가지고 앞장서서 나라의 장래와 발전을 위해서 남들이 꺼려하더라도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가장 시급한 것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바로 세워 후세대가 6·25를 영원히 기억하게 하고, 순국선열의 희생의 가치가 얼마나 숭고한가를 뼛속 깊이 새겨 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과 풍요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한 고귀한 목숨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8선에 전쟁의 총성이 멎은 지도 어언 60년이 흘렀습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 1개월 2일 그리고 17시간 동안, 임진강에서부터 한강, 낙동강으로 밀리고 밀리는 후퇴(後退)를 거듭하다가, 다시 북진(北進)하여 대동강, 압록강, 두만강에 이르기까지 반만년 푸르던 조국 강산은 완전히 초토화되어 사방은 온통 잿더미로 변했고, 사람의 시체가 온 땅을 뒤덮에 발길 닿는 곳마다 선혈이 낭자했습니다. 그리고 약 18만 명의 국군과 유엔군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선에 투입된 초기부터 마지막 휴전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군인은 불과 몇 명 되지 않습니다. 격전지에서 3년 1개월 2일이 지났는데도 살아남았다면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전쟁 중에 겨우 살아남은 국민은 매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말로 할 수 없는 온갖 고생을 견뎌야 했습니다. 6·25전쟁은 영원히 잊으려야 잊을 수 없고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민족적 상처요, 아픔입니다.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에 다시없는 참상이요, 최대의 비극이었습니다. 갓난아이부터 노인까지 극한 아픔과 슬픔으로 신음하는 소리, 가슴 치며 통곡하는 소리는 삼천리 방방곡곡 산야와 천지를 울렸습니다. 어디를 가나 부모를 잃은 고아와 남편을 잃은 아내의 하염없는 눈물이 하수를 이루었고 위로받을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다 같은 처지인데 누구에게 하소연할 것이며, 누가 누구를 위로해 줄 것입니까? 한강변 둑에는 가매장 되었다가 빗물에 씻겨서 노출됐거나 그대로 팽개쳐진 시체들이 즐비하여, 그 악취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김일성 한 사람이 우리나를 한순간에 완전히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6·25전쟁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민족적 참상이요, 최대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젊은 세대는 이 전쟁이 언제 발발했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지난 60년 동안 전쟁의 폐허를 빨리 복구하려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서, 피 흘리며 싸웠던 그 격전지의 폐허 위에는 크고 작은 도로가 개발되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으며 화려한 호텔과 빌딩이 생겼습니다. 지형적으로 변무가 심하여 참전용사가 방문하여도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때 천지를 뒤흔들었던 폭음과 총성도 이젠 너무 멀어져 옛일이 되었고, 피맺힌 통곡도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치열했던 전선마다 이름 모를 산하에 숭고한 피를 흘리며 희생된 자들은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그 누운 자리에서 무겁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6·25전쟁 중에 유엔군이 4만 670명 전사, 한국군은 그 3배가 넘는 13만 7천 877명이 전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현재 공식적으로 찾지 못한 유하는 13만 4천명이나 됩니다. 6·25전쟁 중에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전우 대부분이 그 시신마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름 모를 골짜기와 산야에 방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이 골짝 저 골짝에서 힘겹게 싸우다가 적의 포탄에 맞아 그 전투 현장에 쓰러진 채로, 그때 그 참혹한 역사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번도 없이 나라를 위해 용감히 싸우다가 피어 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꺾인 꽃다운 목숨들이, 그 유해를 찾지 못했거나 찾아도 국군묘지에 안장되지도 못하고 이름 석 자도 남기지 못한 채, 조국 강산 어디엔가 흙과 강물 속에 묻혀 있는 것입니다. 스위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사회계약론(1762년)에 의하면, 국가는 국가 전체의 안전을 위하여 개인에서 생명을 요구할 수 있는 계약 관계이며, 개인은 그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고 국가는 희생한 그들과 그 가족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뜻은 결코 잊혀져선 안 됩니다. 순국선열과 보훈가족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고, 국가적으로 독립유공자와 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고 이장하는 일에도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 36년 식민 치하에서 해방되었으나, 갑작스런 해방이었기에 나라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혼란과 혼돈 속에 빠졌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1925년 4월 17일 창당되었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이, 해방이 되자 감옥과 지하에서 일제히 나와 1945년 8월 20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막강한 실세로 정부 행세를 하며 이 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해방 이후 그 혼란했던 5년 어간, 1946년 대구 10월사건과 1948년 제주 4·3사건이 있었고,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와 김지회 중위(육사 3기)와 홍순석 중위(육사 3기)의 주도로 좌익 남로당원 50여 명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어 광주 4연대, 마산 15연대, 대구 6연대 등이 연속적으로 군 내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군 내부의 남로당은, 육군 총병력의 약 10%에 해당하는 10,317명이나 되었습니다. 만일 국가보안법(1948년 12월 1일 법률 제 10호 통과)이 아니었더라면, 저들은 6·25전쟁 때 후방을 차단했을 것이고 미군이 개입할 여지도 없이 국군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적화 야욕의 살인마 북한의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남침하여, 3년 1개월 2일 동안 전 국토의 80%를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6·25전쟁이 김일성의 남침 야욕에 의해 발발한 사실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데도, 남한이 북침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우리 측에서 북한이 남침하도록 유인했다는 해괴망측한 이론(남침유인설)까지 퍼뜨리는 얼빠진 인간들이 있습니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 4권>에서 “한국전쟁은 옹진반도에서 시작되어 점차 동쪽으로 확대되면서 개성, 춘천, 동해안으로 이어져 나갔다.”(36쪽)라고 허위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인민군은 6월 25일 새벽 4시 전차 258대를 앞세우고 38선 전 지역에서 일제히 남침하였습니다. 같은 책에서 김명석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남북협상파 인사들의 노력이 이승만의 북진통일 노선과 물리력에 의해 제압되어, 평화통일 노력의 계속적인 좌절로 1950년 6월 25일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139쪽)라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그대로 옹호하고 있습니다. 평화통일 제안은 북한 인민군이 남침 준비를 완료해 놓고, 남한 정부를 방심하게 한 후에 뒤통수를 치기 위한 위장기만전술이었습니다. 또한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 6권>에서 “사실상 6월 25일 새벽에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지를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뿐더러 중요하지도 않다.”(171쪽)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북한의 남침 도발의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악의가 가득한 망언입니다.

6·25전쟁은 당시 남북한 군사력만 비교해 보아도 도저히 북침일수가 없습니다. 남한군은 105,752명, 북한군은 198,380명으로 숫자면에서도 북한이 배나 많았고, 더구나 남한은 6월 24일 토요일부터 군인 3분의 1이 휴가 및 외출 중이었습니다. 북한의 군사력 또한 남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습니다. 남한군은 전투기가 한 대도 없는데(연습기만 22대) 북한은 소련 최신 전투기(YAK-9)가 211대나 있었고, 남한은 전차(탱크)가 한 대도 없는데 북한은 소련제 T-34 전차가 258대나 있었습니다. 남한은 105mm 곡사포 88문뿐인데 비해, 북한은 76mm 곡사포 380문, 122mm곡사포 172문이 있었고, 북한은 또한 남한군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자주포(SU-76) 176문, 그 밖에 고사화기 다수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중무장한 인민군 부대가 밀고 내려오는데 어떻게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침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기습공격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시작된 25일 당일 9시 30분에, 인민군 1사단에 의해 개성이 이미 점령되었고, 오전 11시에 인민군 3사단에 의해 포천이 점령되었고, 오후 6시에는 송우리까지 점령되었습니다. 남한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반격도 제대로 못 해보고 문산, 김포 축선(軸線)의 1사단과 5사던, 3사던 그리고 동두천, 포천 축선의 7사단, 2사단, 수도사단 등 도합 6개 사단의 국군 1만 4천 명이 전멸하였습니다. 그래도 6·25가 북침이라고 거짓말을 계속할 수 있습니까?

6·25의 참극이 안겨 준 이 민족의 상처는 참으로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온 강토가 두들겨 맞을 대로 맞았고 터질 대로 터졌으며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산과 들은 동포의 시체로 뒤덮여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고, 인민군의 광란 속에 부모 잃고 자식 잃고 형제자매가 처참하게 죽어 간 그 한 맺힌 울부짖음과 탄식이 방방곡곡에 가득히 메아리쳤습니다.

1·4후퇴 때의 피난길은 폭설이 쏟아져서 눈이 무릎까지 쌓여 발을 떼어놓기도 힘이 들었는데, 피난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머리에 이고 어린아이까지 잡아끌면서 겨우겨우 옮기는, 지칠 대로 지친 발걸음에 굶주림까지 겹쳐 왔습니다. 가는 곳마다 부모 잃은 어린아이들이 길에서 헤매고 있었고 가깝게 들려오는 포성에 마음을 졸였습니다. 이러한 피난 행렬을 피부로 겪은 세대들은, 몸서리치던 그때의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 자신이 바로 그때 서부 전선 토성(개성)지구에서 전쟁의 첫 순간부터 적과 싸웠던 사람이므로, 당시에 체험했던 사건들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전쟁이란 것은, 이 세상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비극입니다. 저는 3년 동안 전쟁의 한가운데서 삼천리 금수강산에 가득했던 끔찍한 고통과 슬픔, 그 상처를 다 보았습니다. 길거리마다 쌓여 있는 시체, 부상자들이 고통 중에 신음하는 소리, 부모 잃은 어린아이들과 자식 잃은 부모들의 울부짖는 소리,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 허기져서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풀뿌리를 먹는 사람들, 실로 저마다의 통곡과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치고 삼천리에 메아리쳤습니다.


6.25전쟁은 우리민족에게 가장 뼈아픈 냉전 시대의 비극이었다.

이 모두가 해방 이후 좌·우익의 첨예한 갈등 때문에 시작된 것이고, 이북 공산당이 적화야욕을 품고 무력으로 남침하여 6·25전쟁을 일으킨 결과입니다. 우리는 그때의 아픔을 뼈에 깊이 되새기면서, 두 번 다시 전쟁의 쓰라림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참혹했던 지난날 역사의 발자취를 거듭거듭 되밟아 보고 정확하게 연구해야만, 우리의 앞날을 대비할 수 있고 적에게 맞설 만한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을 소홀히 하면, 60년 전의 참혹한 희생은 또다시 우리의 역사 위에 반복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역사적 사실은 결코 시대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해석에 있어 여러 의견이 나올 수는 있으나 실체적 진실까지 왜곡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강자(승자)편에서 역사적 진실 자체를 가감하거나 왜곡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역사는 더해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되며, 정확한 사실 그대로 밝혀져야 합니다. 거짓 없는 역사는 현재 속에서 놀라운 생명력을 발휘하며, 현재를 곧게 비추어 주는 선명한 거울이 되며, 미래를 향해 올바른 방향을 힘차게 외치는 나팔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곡 날조된 역사는 필연코 우리와 후손들을 나약하고 병들게 하여 나라의 장래를 암담하게 만듭니다. 과거 역사를 사실대로 진단하지 못한다면 앞을 못 보는 장님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국토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으며, 내부적으로 이념적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아직도 국토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는데, 내부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념적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더더욱 거짓 없는 역사의 보존을 위해 사실을 왜곡 없이 기록하는 일과 젊은 세대들을 위한 올바른 역사 교육이 강력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국사를 정직하게 사실대로 왜곡 없이 기록하고 이야기할 때, 그것만이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어 참된 애국심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국가(國家)란 민족의 커다란 집입니다. 나라 국(國)에 집 가(家), 국가는 실로 민족 대식구가 모여 사는 영원하고 광대한 집입니다. 이 나라에 사는 백성들은 저마다 대한민국의 한 가족 한 식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라고 하는 것은 상황과 필요에 따라 입었다 벗었다 하는 옷가지 같은 것이 아니고, 절대로 떼어내 버릴 수 없는 내살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백성과 국가는 일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디 이 책을 읽는 대한민국 백성 모두가 뜨거운 민족혼으로 조국의 앞날을 늘 생각하고 염려하며, 나아가 일사각오(一死覺悟)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나라를 지키신 진실된 애국자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