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대로 되는 믿음 (마 15:21-28)
오늘 본문은 귀신에게 자기 딸을 빼앗긴 어머니의 절규와 간절한 믿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막 7:25-26을 볼 때, 그녀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수로보니게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점령 때 그 땅을 쫓겨나 두로와 시돈 지방에 살던 사람들로서, 유대인들에게는 멸시와 천대를 받던 민족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의 형편이 얼마나 딱합니까? 평생을 멸시와 천대 속에 살던 사람이 딸마저 귀신에게 빼앗기고, 자신의 자아마저도 딸과 함께 귀신에게 정복당한 여인입니다. 그 여인의 간절한 소원의 믿음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가나안 여인은 딸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을 일치시켰습니다.
본문 22절에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바로 가나안 여인이 딸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을 동일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딸이 귀신들렸다고 해서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귀신들린 딸과 자기를 동일시했던 것입니다. 딸의 병이 곧 자신의 병이요, 딸의 곤경이 곧 자신의 곤경이었기에, 그녀는 딸과 똑같은 상황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와서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여기서 ‘흉악히’(:22)라는 말은 ‘위험할 만큼 해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자신의 딸이 거의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자신의 몸과 정신, 마음이 온통 딸에게 가 있어서, 자신도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절박한 심령으로 주님께 나아온 가나안 여인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께 마지막 소원을 가지고 나오게 된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비록 육체적 기능이 파괴되고 마비되고 말았지만, 이것을 고칠 분은 다윗의 자손 메시아로 오신 예수밖에 없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인간적인 한계 상황에 직면한 나머지, 절망과 불안, 공포, 낙심, 허무, 슬픔밖에 없는 여인이 주님께 나아온 것이며, 딸의 파괴된 육신, 딸의 절망을 자신의 것으로 그대로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녀에게는 딸의 생명이 곧 자신의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2.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예수께로 나오는 믿음입니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예수를 믿는 큰 믿음은 가나안 여인을 그분께로 나오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시선과 이목이 날카롭게 집중되고 있는데도 주저하거나 물러섬 없이 그녀는 주님을 향해서 담대히 나아갑니다. 마치 레일 위를 기차가 미끄러져 달려가듯, 가나안 여인은 딸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을 걸머지고 주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정지가 없는 신앙입니다.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이쯤 되면 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끊어지지 않는 사랑, 중단이나 후퇴가 없는 사랑, “네 아픔이 곧 내 아픔이고 네 괴로움이 나의 괴로움이다”라고 동일시하는 사랑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 다윗의 자손으로서 메시아이심을 알았고 믿었기에 가능한 행동입니다. 당시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주로, 다윗의 자손으로 알지 못했지만, 가나안 여인은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고백이 그 증거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예수님은 어떠한 주가 되십니까? ‘다윗’이란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인 것처럼, 창조주, 구원의 주, 영생의 주,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주님이십이다. 사랑의 주이십니다. 승리의 주를 의미합니다. 그분은 빛이시며(요 8:11), 부르기 전에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분입니다(사 65:24).
3.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절망할 줄 모르는 기도의 신앙입니다.
본문 22절과 23절을 보면, 가나안 여인은 계속해서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소리는 간절한 기도의 소리입니다. 귀신들린 딸과 자기를 동일하게 여기면서 자기도, 딸도 동시에 맡기는 기도입니다. 어머니의 최후의 몸부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놓치면 절대로 고치지 못한다’라고 하는 결사적인 소원의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본문 23절을 볼 때,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옵니다. 주님의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부르짖습니다. 급기야는 주님 앞에 절하며 엎드렸습니다.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이 간구는 화급한 구조의 요청입니다. 무릎을 꿇은 여인은 지극한 겸손의 표상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26절 말씀을 볼 때 ‘자녀의 떡을 개에게 줄 수 없다’며 여인을 멸시하고 천대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절망할 줄 모르는 기도의 신앙으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예, 그렇지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것을 먹습니다.” 절대 겸손의 신앙입니다. 절대 기도, 절대 예배의 신앙, 바로 가나안 여인의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아무리 짓밟고 무시하셔도 물러서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기도의 신앙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주님의 응답입니다. 원문에는 ‘오오~’라는 감탄사가 ‘여자야’라는 말 앞에 있습니다. 여자를 향한 예수의 만족, 예수의 기쁨이 화산같이 폭발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개에게 던지는 부스러기라도 사모하는 지극한 겸손의 믿음을 보시고 인정하여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소원대로 되는 믿음입니다.
결 론 : “네 믿음이 크도다 소원대로 되리라”–28절의 말씀입니다. ‘소원대로’란 말은 ‘네가 원하는 만큼’을 뜻합니다. 주님의 응답과 동시에, 가나안 여인은 귀신에게 빼앗긴 딸을 찾아왔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처럼 소중한 생명을 빼앗기지 않고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후퇴할 줄 모르고 절망할 줄 모르는 믿음으로, 가나안 여인과 같이 원하는 만큼의 축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