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장자의 축복 (하나님의 주권 섭리)
창세기 27장은 이삭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약 136세) 그의 아들 야곱(약 76세)에게 하나님의 언약과 장자의 축복을 계승하는 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삭은 그의 아내 리브가와 둘째 아들 야곱에게 속아서 부지중(不知中:알지 못하는 사이)에 야곱을 축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27:1)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창 27:23) “…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그런데, 히브리서에는 이삭이 믿음으로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다고 기록하면서, 이삭의 믿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히 11:20). 그렇다면 이삭은 ‘부지중에’ 축복했습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축복했습니까?
1. 처음에 이삭은 야곱에게 ‘부지중에’ 축복하였습니다.
이삭은 자신을 에서라고 속이고 별미를 가지고 들어온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다 하였습니다. 창세기 27:23에서는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분별치”에 쓰인 히브리어 ‘히키로’의 원형은 ‘나카르’인데, ‘심사숙고하다, 철저하고 세밀하게 조사하다’(창 31:32)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로’라는 히브리어 절대 부정어가 덧붙여져서, 이삭이 아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지 않고 축복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에서라고 생각하여 축복하였던 것입니다.
야곱이 나간 후 곧 형 에서가 들어와 별미를 드리며 축복을 요구했을 때, 이삭의 반응에 대해 (창 27:33)에서는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나중에 이삭은 야곱에게 ‘믿음으로’ 축복하였습니다.
창세기의 기록만 보아서는, 이삭이 부지중에 야곱에게 축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히 11:20)에서는 “믿음으로” 축복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이삭이 자신의 생각을 즉시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처음에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에서가 장자이기도 했지만, 이삭이 개인적으로 에서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창 25:28). 만약 이삭이 인간적인 사랑에 얽매였다면, 에서에게 다시 장자의 축복을 해 줄 수도 있었겠지만,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창 27:34, 37-38).
(창 27:33) 하반절에서 “…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정녕’에 쓰인 히브리어 ‘감’은 ‘진실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라는 뜻입니다. 이삭은 야곱이 받은 축복이 어떤 인간의 힘으로도 변경될 수 없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는 순간 에서를 향한 인간적인 사랑을 과감히 끊는 이삭의 결단,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육정을 온전히 끊고 버리는 일은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마 12:50). 칼빈은 이 구절에 대하여, “이삭은 육신의 애정을 부인하고, 이제 완전히 하나님께 스스로 복종하며, 하나님을 자기가 발설한 축복의 장본인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감히 철회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려 마땅한 영광을 돌렸다”라고 주석하였습니다.
이삭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을 때 즉시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굳게 확정하고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이러한 이삭의 믿음의 위대함을 보고,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였으며”(히 11:20)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2) 이삭은 하나님의 주권 섭리를 깨닫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고 “나가자 곧” 에서가 돌아온 것은(창 27:30) 아주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이삭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말씀이 번뜩 뇌리를 스쳤을 것입니다. 곧 리브가가 쌍태를 가졌을 때 자기 태중에서 일어난 싸움을 놓고 기도하자(창 25:22),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던 말씀입니다(창 25:23).
이삭은 자기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의 주권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깨닫고 크게 떨었습니다(창 27:33). 공동번역에서는 “이삭은 그만 기가 막혀 부들부들 떨며 말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심히 크게 떨며”라는 말씀은 원어적으로 ‘아주 강하게, 두려워하고 크게 두려워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이 두려움은 단순히 야곱에게 축복한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 때문만이 아니고, 자신의 편견과 고집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거스르고 에서를 축복할 뻔하였다는 생각에서 나온 ‘거룩한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 섭리에 대해서는 (롬 9:10-13)에 잘 나타납니다(참고-말 1:2-3).
(롬 9:10-13) “…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삭은 영의 눈이 열려 야곱이 장자인 것과, 그가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축복해 달라는 에서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이삭은 언약의 상속자 야곱을 떠나 보내면서,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행한 것처럼 고향 친척 집에서 아내를 구할 것을 당부하고(창 28:1-2, 6),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언약이 야곱을 통해 성취되도록 다시금 마음을 다해 복을 빌었습니다(창 28:3-4). 이는 이삭의 확신의 표였으며, 이 후 성경에는 장자와 차자를 구속사적인 순서에 따라 주로 “야곱과 에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28:5, 수 24:4, 히 11:20).
훗날 야곱도 죽기 직전에 눈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창 48:10),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어 축복하였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오른손을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려 했지만,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라고 하면서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고 축복하였습니다(창 48:17-20).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권 역사로 야곱에게 영적 눈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하기는커녕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에서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창 27: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여기 ‘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비르’로서 ‘주인,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중대한 구원 섭리를 깨닫고, 에서에게 ‘보라! 내가 야곱을 너의 주인(통치자)으로 임명했노라’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의 섭리가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에 상반된다 할지라도, 이삭처럼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장자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에서가 이삭에게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물었을 때(창 27:36下), 이삭은 에서에게 답하기를 ‘너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창 27:37下). 한마디로 ‘축복은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창 27:38)라고 애원하는 에서에게 답을 대신하여 ‘네가 사는 땅은 기름지지 않고 하늘의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이며 네가 칼을 믿고 살 것이고 네 동생을 섬길 것이다’(창 27:39-40)라고 저주를 내렸습니다.
에서의 방성대곡(창 27:34, 38)은 하나뿐인 장자권의 가치를 경시했던 어리석은 자의 뒤늦은 후회일 뿐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 12:17)에서는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대성통곡하는 회개를 할지라도 “회개할 기회”를 이미 놓친 후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중대한 교훈입니다.
이처럼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기라”(창 25:23)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김없이 계획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후회나 변경이 전혀 없습니다(민 23:19, 롬 11:29, 히 6:18).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습니다(시 139:16).
표면적으로 볼 때 이삭은 잠시 속은 것 같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사람에게 속지 않았으며,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절대 주권적인 힘이요, 능력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섭리가 나타났을 때, 인간의 생각을 포기하고 육신의 정도 단호히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이삭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