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와 세계사 여행 ④ 로마제국
헬라 제국 이후 세계 정세와 이스라엘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세계 정세는 더없이 혼란스러워졌다. BC 369년까지만 해도, 북쪽의 에트루스칸을 예속시켜 독립한 자그마한 나라 로마를 주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독립 이후 로마는 헬라의 식민지들을 하나씩 차지하여 BC 275년에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이어서 카르타고(Carthage)와의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BC 262-146년)과 동방 헬라와의 4차에 걸친 마케도니아 전쟁(BC 214-148년)에서 승리함으로써 지중해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당시는 다니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질풍노도와 같이 세계의 주인이 바뀌는 역사의 여울목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헬라 제국을 물리치고 하스몬 왕조로 독립을 이뤄 한껏 자신감이 고취되어 있어(BC 142-63년)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분열과 다툼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성경에 예언된 로마
로마는 다니엘서 2장 ‘큰 신상(神像)’의 예언에서 ‘철로 된 종아리’에 해당되는 나라이다(단 2:33, 40). 이 예언대로 로마는 ‘철의 제국’(The iron monarchy of Rome)으로 불렸던 강력한 제국이었다. 다니엘 7장에서 묘사된 네 짐승의 이상에서는 ‘무섭고 놀랍고 극히 강하며 큰 철 이’가 있는 짐승으로 묘사되었다. 이 넷째 짐승의 머리에 있는 열 뿔은 로마가 망한 이후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열 왕을 가리키며(단 7:7, 24) 이 열 뿔 사이에서 일어날 작은 뿔은 장차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를 괴롭히는 적그리스도를 상징한다(단 7:8, 24-26). 이 철의 제국 로마가 BC 63년 폼페이 장군을 앞세워 예루살렘을 함락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또 다시 새로운 제국의 지배를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폼페이는 유대를 점령한 후 힐카누스 2세를 유대 통치자로 세웠다. 폼페이가 유대 정복을 이루고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로마는 BC 59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시이저)가 통령으로 선출되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1차 삼두정치를 하던 시대였다. 이후 주전 53년 파르티아와의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고, 폼페이우스와 권력다툼을 하던 카이사르는 주전 45-44년에 원로원 세력을 물리치고 단독으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로마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도 원로원에 의해 암살되고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분봉 왕 헤롯과 총독 빌라도
헤롯 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터는 하스몬 왕조를 무너뜨리고 BC 63년 유대를 로마의 속국으로 넘긴 인물이다. 그는 유대를 로마에 넘기고 로마로 가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복한 지금의 서유럽(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하며 자신의 아들인 헤롯을 유대인의 왕(분봉 왕)으로 임명하도록 옥타비안 황제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BC 37년부터 BC 4년까지 유대를 다스리게 된 헤롯은 건축 왕이란 별명처럼 유대 곳곳에 크고 작은 건축물들을 많이 세웠는데, 대표적으로 로마 황제를 위한 ‘가이사랴’라는 신도시와 유대인들을 위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진행하여 로마와 유대의 환심을 동시에 사고자 하였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유대는 이 헤롯 대왕이 통치하였으며, 예수님 가족이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 다시 돌아올 때는 그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 지역과 사마리아와 에돔 지역을 다스렸다(마 2:22). 아켈라오는 매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정치를 펼쳤기에 후에 참다못한 유대와 사마리아 귀족들이 로마 황제에게 대표단을 파견해서 그를 숙청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결국 AD 6년에 아켈라오는 왕위에서 쫓겨났고, 그때부터 유대 지역은 로마 총독에 의해 통치를 받게 되었다.
또한 예수께서 ‘저 여우’(눅 13:32)라고 불렀던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로서 헤롯 아켈라오의 형제다. 그는 자신의 동생이었던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마 14:3-4). 이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께서 사역하실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의 분봉 왕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공생애 3년을 사역하실 때 맞닥뜨리게 되는 왕이 바로 헤롯 안티파스이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지만 예수로 인해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눅 23:12). 헤롯 안티파스의 동생인 헤롯 빌립(빌립 2세)은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눅 3:1)을 다스렸다. 이곳은 갈릴리 동북부 지역으로, 로마 황제를 위해 ‘파이네온’이라는 지역을 재건립한 후 황제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 불렀다. 그는 헤롯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온순하고 존경받는 자였기에 예수께서도 이 지역에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헤롯 아그립바’는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왕으로 헤롯 대왕의 손자이다. 사도 야고보를 처형하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기도 했지만 결국은 벌레가 먹어 죽었다(행 12:21-23). 헤롯 아그립바가 죽자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가 17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는데(행 25-26장), 이 왕이 사도 바울을 심문했던 자이다. 그는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으로 AD 70년경에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로마에서 살다가 죽었다. 이렇게 헤롯 가문은 하스몬 왕조 말기와 로마 제국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통해 에돔 족속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통치자 가문으로, 그리고 ‘분봉 왕’이라는 독특한 정치 형태를 유대에 세워서 통치하는 가문으로 남게 되었다.
분봉 왕을 세우는 것과 더불어 로마는 총독을 임명하여 유대의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예수 당시 총독이 바로 빌라도였다. 당시 로마 황제는 디베료(눅 3:1)였는데, 그는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의붓아들이었다. 그는 로마의 황제가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가 아닌 카프리 섬에 은둔하며 문서 정치를 시작하였다. 이때 디베료의 명령으로 유대에 파견된 총독 빌라도는 헤롯이라는 분봉 왕과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대제사장들, 그리고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유대의 고위급들, 특히 가난한 민중들의 반란이라도 발생했다는 보고서가 혹시라도 카프리 섬으로 날아가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오직 문서로만 황제를 설득해야 했던 빌라도 입장에서는 만약 민란이라도 발생하면 그 뒷감당이 쉽지 않았다. 이런 로마의 정치 상황을 유대의 대제사장들 세력과 분봉 왕 헤롯이 예수님의 숙청에 절묘하게 이용했던 것이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와 공인
AD 54-68년까지 14년간 통치했던 로마 5대 황제 네로는 64년에 발생한 로마의 대화재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도에게 전가하여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이후, 313년까지 249년간이나 계속된 로마의 박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이르러 극적인 반전을 맞았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 내에 공인하면서 아프리카 총독에게 지시하여 각 교회에서 몰수한 모든 재산을 돌려주고 성직자들에게 기금을 제공해 주도록 하였다. 나아가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에는 밀라노에서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해졌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천년간 기독교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처럼, 로마 시대 하에서 기독교는 박해와 공인이라는 양극적 반전을 경험하게 되었다. 로마 치하에서 기독교는 폭발적인 성장을 구가하였다. 로마의 발달된 도로체계와 행정 시스템이 기독교의 세계적 전파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395년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뉜 후, 476년에는 서로마가, 1453년에는 동로마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오늘날의 터키)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찬란한 역사도 막을 내렸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위치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는 역할을 감당한 로마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제아무리 큰 제국이라도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하나의 도구와 배경에 지나지 않음을 보게 된다. 한때, 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다. 그 길을 닦았던 로마가 스스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일부임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로마를 거울삼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근원적 목적을 깨우쳐 본다.
출처 : 참평안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