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와 세계사 여행 ③ 헬라 제국
알렉산더의 짧은 생애와 헬라 제국
알렉산더의 헬라 제국은 오늘날의 그리스 지역으로, 그야말로 폭풍처럼 등장하여 바람처럼 사라진 제국이다. BC 2,000년경부터 다뉴브강의 하류를 거쳐 해안 지대로 남하한 아케안 족과 도리안 족의 후예가 헬라 제국을 세웠다. 헬라 북쪽 마게도냐에서 필립(BC 359-336)이 스파르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도시국가를 정복하였고, 필립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왕위에 오르자마다 테베스를 함락시키고 즉위 2년 뒤에는 헬라의 도시들을 페르시아의 억압에서 해방시켰다. 이어 BC 334년에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 다리오 3세의 군대를 잇수스(잇소)에서 무찌른 후(BC 333) 남하하여 두로와 수리아, 팔레스타인을 거쳐 애굽의 항구까지 함락시킨 후 나일강 하류에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다시 북상하여 초생달 옥토를 따라 티그리스 강을 건너 BC 331년에 페르시아 왕 다리오 3세의 대군을 알벨라에서 대파하고 바벨론에 입성했다. 그 후 다리오가 BC 330년 죽임을 당하자 페르시아는 알렉산더의 것이 되었다. 알렉산더의 원정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6년 동안(BC 330-324) 멀리 동으로 옥서스(Oxus)와 작살티스(Jaxartes)의 두 강을 지나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에 이른 후 해안선을 따라 7년 만에 바벨론으로 돌아와 그곳에 신제국의 수도를 정하고 아라비아 반도의 정복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아라비아 원정을 앞두고 열병에 걸려 32세에 바벨론에서 죽음으로써(BC 323년 9월 13일) 질풍노도같이 세력을 확장하던 헬라의 권세도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를 볼 때 제 아무리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세계를 호령한다해도 모든 것이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헬라 제국의 역사는 하나님을 향하지 않은 위대함은 허무함밖에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 속 헬라 제국과 제국의 분열
성경은 이러한 헬라 제국을 ‘놋과 같은 나라’(단 2:32,39), ‘표범과 같은 짐승’(단 7:6), ‘수양을 쳐서 엎어뜨리는 수염소’(단 8:5-8)로 묘사하고 있다. 이 수염소는 두 눈 사이에 현저한 뿔이 있는데(단 8:5) 이 뿔은 헬라의 첫째 왕으로 가장 강력했던 알렉산더 대왕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큰 뿔이 꺾이고 네 뿔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나옴으로써 알렉산더 사후에 나라가 넷으로 쪼개질 것을 말해주고 있다(단 8:22). 다니엘서의 예언처럼, 알렉산더 사후 시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안티고누스(Antigonus)에 맞서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Diadochi, 디아도키)를 자처하는 장군들의 권력다툼 시기인 ‘디아도키시대’(BC 323-301)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안티고누스가 BC 301년 입수스(Ipsus) 전쟁에서 죽자 디아도키 시대가 끝나고 네 왕조로 분열되었다. 북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다스리던 셀류큐스(Seleucus), 애굽과 팔레스타인, 남부 시리아 지역을 다스린 프톨레미(Ptolemy), 소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리시마쿠스’(Lysimachus), 헬라(마게도니야, 그리스) 지역을 다스리던 카산더(Cassander)가 이들 네 지역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이 네 왕국 중 특히 성경의 역사와 관련되는 왕국이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이다. 먼저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하여 다스리던 왕조는 프톨레미 왕조다. 이들은 이방 종교에 관대해 유대인들을 알렉산드리아에 이주시켰으며, 프톨레미 2세 지원 하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당시 세계적 공용어인 헬라어로 번역하였다(70인경). 헬라어가 당시 세계 공용어가 된 배경에도 세계를 정복하고 헬라어를 보급한 알렉산더가 있다. 그러나 주전 198년, 셀류쿠스의 왕 안티오쿠스 3세가 프톨레미 5세와의 파내우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팔레스타인 통치권은 셀류쿠스 왕조로 넘어가게 되었다. 프톨레미 왕조는 유다 관습과 전통에 관용적이었던 반면, 셀류큐스 왕조는 헬레니즘 문화를 강압적으로 이식시키려 하고 많은 세금을 부과했으며 성전 보물을 약탈하기까지 함으로서 강력한 저항을 초래하였다. 특히 셀류쿠스의 왕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을 스스로 신의 현현(顯現)으로 자처하여 ‘에피파네스’(Epiphanes)라 칭하였다.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성소’를 더럽혔고(단 11:31) 주전 167년에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였으며 12월 8일에는 성전의 제단에 ‘제우스 신상’(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숭배하게 하였다(단 11:31). 심지어 율법을 지키는 자는사형에 처하고, 왕의 생일을 기념케 하기 위해 매월 25일마다 돼지를 잡아 제단에 바치도록 하였다. 성경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대하여 “네 뿔 중에 한 뿔에서 나오는 작은 뿔”로 칭하고 그가 영화로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하늘 군대인 이스라엘 백성을 쳐서 별들을 떨어뜨리고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고 성소를 헐어버린다고 기록하고 있다(단 8:8-11).
▲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헬라 영토
헬라 제국의 흥망성쇠와 이스라엘의 역사
셀류쿠스 왕조의 반(反) 유대인 정책은 유대인들의 강력한 저항과 분열을 가져왔다. 헬라문화의 동화(同化)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신앙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바리새파 유대인들과 헬라주의에 동조하는 사두개파 유대인들의 관계가 악화되어 갈 때 유대주의자들이 안티오쿠스 4세가 애굽 원정길에서 죽었다는 헛소문을 내고 다수의 헬라주의자들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BC 169).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주의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모든 종교행사를 금하는 종교박해를 감행했다. 당시 제사장 맛다디아는 제우스 신에게 제사하라는 왕명을 거절하고 제단을 파괴한 후 고프나 산지로 도망하여 경건한 유대인인 하시딤과 합류, 반란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BC 167). 맛다디아의 아들 유다 마카비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주전 164년에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율법의 규례대로 성전을 정화하고 8일간의 봉헌축제(‘하누카’, 또는 ‘수전절’)를 열었다. 마카비의 동생 요나단 때에는 이스라엘 북동 지역과 트랜스 요르단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마침내 시몬의 지도하에 주전 142년 유다는 셀류쿠스 왕조를 완전히 몰아내어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몬 왕조’를 건립하게 되었다(BC142). 하지만 하스몬 왕조는 내부 분열과 갈등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BC 63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에 의해 다시 예루살렘을 내주고 로마의 지배를 받게되고 말았다.
▲ 현재 지도에서 본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헬라 영토
알렉산더의 헬라제국과 그의 사후 분열된 왕국의 통치시기에 이스라엘은 제국의 식민지배뿐 아니라 ‘헬라주의’라는 새로운 사상과 문화와 싸워야 하는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는 그 어떤 정치적 세력보다 강력하고 힘든 상대였다. 헬라 제국은 무너졌지만 그들의 문화인 헬레니즘은 이후 서양 사회뿐 아니라 세계사에 지금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내부적으로 이에 동조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로 분열되었으며 대대로 내려오던 히브리 종교와 사상(헤브라이즘)이 변질될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예수 시대에 이르러 그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상황이 오늘날과 흡사한 것을 볼 수있다. 세상의 보암직한 문화와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타협하고 변질되고 분열되고 있지는 않은지, 헬라 제국을 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긴장하게 된다. 헬레니즘 문화에도, 현대의 호화찬란한 문화에도 끝이 있다. 세상에 영원한 건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그리고 영원하지 않은 건, 결국 죽은 것이거나 죽을 것에 불과하다. 이 단순하고도 감사한 진실을 다시 한 번 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