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출 20:17, 신 5:21)
1. 제 10계명의 해석
제 10계명은 십계명의 최후 결론이자 이웃 사랑을 위하여 주신 마지막 계명입니다. 마지막 계명에는 ‘탐심’(貪心)을 금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가지려는 마음의 욕심입니다. 현재 감사할 만큼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않고 더 원하는 것입니다(잠 30:15). 잠언 4:23에서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들어오는 즉시 물리쳐야지, 때늦은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마음에 찾아와서 귀한생명의 근원을 송두리째 빼앗기 전에, 날마다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잠 16:32, 25:28).
(1) “탐내지 말지니라”
① 외적인 탐심과 내적인 탐심
출애굽기 20:17에 기록된 “탐내지”에 쓰인 히브리어는 ‘하마드’로, ‘갈망하다, 열망하다’라는 뜻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외부에 있는 것을 보고 감정의 충동을 일으켜 탐을 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신명기 5:21에 기록된 “탐내지도”라는 단어에는 다른 히브리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어 ‘아바’로, ‘마음이 기울다, 사모하다, 몹시 원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바’는 주로 ‘마음속에 있는 욕망 때문에 생기는 탐심’을 가리킵니다. ‘하마드’가 사물 자체의 고유한 가치 때문에 발생하는 외적인 탐심이라면, ‘아바’는 보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탐심인 것입니다. 탐심에 대한 두 가지 단어가 병행으로 사용된 것은, 하나님께서 외적인 탐심이나 내적인 탐심을 모두 금하셨음을 의미합니다.
② 탐심의 탈
‘탐심’이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간교한 뱀을 통해 경험하였듯이, 그 수법이 너무나 간교하고 너무나 위장을 잘 해서 누구나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이것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5에서 “탐심의 탈”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 “탈”의 헬라어 어원은 ‘프로파시스’이며, ‘겉으로 그럴싸하게 꾸미는 위장, 마음에도 없으면서 짐짓 그런 체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탐심의 탈을 쓴 사람의 행동은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전부 위장입니다.
③ 모든 계명의 마지막 결론
예수님께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눅 12:15)라고 말씀하심으로, 탐심이 성도가 반드시 물리쳐야 할 적(敵)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또 씨 뿌리는 비유에서 사람의 심령을 밭에 비유하면서 재물의 유혹, 곧 탐심을 ‘가시’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마 13:22, 막 4:18-19, 눅 8:14). 마음속에 탐심이 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은 탐심이라는 가시에 막혀 결코 결실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읽고 듣고 깨달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치 못하는 이유는 바로 탐심에 막혀 그 씨가 자라지 못한 결과입니다.
(2) “이웃의 집”
출애굽기 20:17 상반절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 타락한 속성 때문에 자기 소유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집 울타리 너머의 것에 욕심을 부립니다. 여기 “집”은 히브리어로 ‘바이트’입니다. 이것은 건물뿐만 아니라 비유적으로 ‘가족’(창 7:1, 12:17, 35:2, 42:19)입니다. ‘재산’(에 8:1)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네 이웃의 집”은 이웃이 가진 소유의 전부를 의미합니다.
(3) “이웃의 아내”
신명기 5:21에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17과 달리 “아내”가 먼저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웃의 소유 가운데 ‘아내’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9:14에는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잠 5:18-19). 따라서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것은 이웃의 가장 소중한 것, 그 전부를 탐내는 것과 같습니다.
(4)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
충성된 종은 주인의 집과 모든 소유물과 맡아서 관리하고 주관하는 자입니다(창 39:4-6上).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자였습니다(창 24:2). 그렇다면 충성된 종은 주인이 가진 모든 소유보다 귀한 재산입니다.
(5)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
출애굽기 20:17 하반절에서는 이웃의 소유에 대하여 ‘육축과 나머지 소유물’을 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 10계명에서 금하는 내용은 사실상 제 7계명 “간음하지 말라”와 제 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통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금하신 것입니다. 이는 이웃의 아내와 그 소유에 대하여 우리의 눈과 마음이 계속해서 애착심을 갖는 자체를 금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적질하려는 결심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탐심이 들어오면, 그 악한 의도와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제 10계명의 세부 율법
(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신 25:5-12)
①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다 행하라(신 25:5-10)
신명기 25:5-10에는 형제 중 한 사람이 아들이 없이 죽었을 경우,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서는 안 되고, 남은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신 25:5). 그 여인의 낳은 첫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에서 그 이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신 25:6), 그것이 바로 “남편의 형제 된 의무”(신 25:5-7下)였습니다. 이를 계대 결혼(繼代結婚)혹은 형사취수(兄死取數)라고도 합니다.
② 남자의 음낭을 잡은 여인의 손을 찍어 버리라(신 25:11-12)
두 남자가 싸우는 중에 한 남자의 아내가 개입하는 경우, 아내가 손을 벌려 상대방의 음낭을 잡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잡다’의 히브리어 ‘헤헤지카’는 ‘꽁꽁 묶다’라는 의미의 동사 ‘하자크’의 사역형(히필)으로, ‘힘껏 꽉 잡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음낭을 잡는 것은 생식 기능을 할 수 없는 성 불구자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입니다.
(2)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신 25:13-26:15)
① 공정한 상거래(신 25:13-16)
하나님께서는 공정(公正:공평하고 올바름)한 상거래를 위하여 ‘같지 않은 저울추’, ‘같지 않은 되’를 두어서는 안 되며, 오직 공정한 추와, 공정한 되를 두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네 날이 장구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5:13-15). 그러나 공정하지 않은 저울은 하나님께 가증합니다(신 25:16).
② 아말렉 진멸 명령(신 25:17-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안식을 주실 때에,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신 25:19, 참고-출 17:8-16, 삼상 15:2). 아말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애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을 만났을 때, 피곤함으로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습니다(신 25:17-18). 그들은 방어할 힘이 없는 연약한 자를 공격한 것이므로, ‘탐내지 말라’라는 열 번째 계명과 연결됩니다.
(3) 가나안 땅에 정착해 얻을 첫 열매와 십일조(신 26:1-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들어가서 모든 소산의 맏물(첫 것)과 십일조를 온전히 구분하여 바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출 23:19上, 34:26上, 신 14:22).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소유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도록 하여, 이스라엘은 단지 하나님의 것을 지키고 다스리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는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악한 마음이 싹트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해 주시는 좋은 방책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행하도록 일일이 제도화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와 상의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모세에게 지시하여 백성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이 모든 규정 속에는 이 세상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죄악에 물들기 쉬운 인간의 연약한 속성을 배려하신 깊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3. 탐심 개념의 복음적 확대
탐심은 근본적으로 성도 개개인의 일평생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못하는 불신과 원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 무엇 하나 걸림이 없고 감사의 웃음꽃이 만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크게 드러냅니다(시 8:4, 136:1, 144:3).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무감각한 악인(惡人)은 자만하여 감사가 메마르고, 평강이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매사에 걱정과 염려뿐입니다(시 10:3-4, 32:10, 사 48:22, 57:21, 골 3:15). 이제 탐심을 물리치는 근본적인 비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하여 상고해 보겠습니다.
(1)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재산 상속 문제에 관하여 말씀드리면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부탁하였습니다(눅 12:13). 예수님께서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라고 책망하시고는(눅 12:14),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15). 여기 “탐심”은 헬라어 ‘플레오넥시아’로, ‘더 가지려는 욕심, 분에 넘치도록 더 가지려는 탐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모든”을 뜻하는 헬라어 ‘파스’를 붙이심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외에 ‘더 가지려는 모든 유형의 탐욕을 물리치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리치라”는 ‘지키다, 보호하다, 감시하다’는 뜻의 헬라어 ‘퓔랏소’의 현재 중간태로, ‘모든 종류의 과도한 탐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간의 화복보다 재산을 챙기려는 그 마음속의 탐심을 지적했습니다. 이보다 더욱 사악한 점은, 그가 자신의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예수님의 권위와 명성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탐심은 하나님과 신앙을 이용해서라도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파렴치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2) 자족(自足)과 지족(知足)
모든 탐심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기의 소유와 삶에 대한 불만족에서 출발합니다. 디모데전서 6:6-8에서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지족”(知足: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앎)의 헬라어 ‘아우타르케이아스’는, 빌립보서 4:11의 “자족”(아우타르케스, 自足:스스로 넉넉함을 느낌)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뜻하는 대명사 ‘아우토스’와 ‘넉넉하다, 충분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르케오’의 합성어로, ‘자기 스스로 충분히 만족할 줄 앎’이라는 의미입니다.
①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사도 바울은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라고 고백하면서(빌 4:11),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빌 4:12). 빌립보서 4:11의 “배웠노니”는 헬라어 ‘만다노’로, ‘행동이나 경험, 사용과 실행을 통해서 배우다’라는 뜻입니다. 빌립보서 4:12의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표준새번역)라는 선언은, 인생들이 갈망하는 최고의 학위를 능가한 것이요, 모든 철학의 마지막 경지를 뛰어넘은 자의 고백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나,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빌 4:18).
②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
사도 바울이 삶 속에서 경험하여 깨달은 “일체의 비결”이란 다름 아닌 “은혜로 사는 비결”입니다. 자족이란 스스로 만족한다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안하고 풍족할 때가 아니라 죽음에 이를 정도의 극심한 환난 중에 얻은 것입니다. 즉 부요할 때가 아니라 가장 궁핍할 때였으며, 한가할 때가 아니라 밤낮으로 일하며 수고할 때였으며, 건강할 때가 아니라 체력적으로 가장 크게 한계를 느낄 때였습니다.
③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사도 바울은 매사에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한 자입니다(고전 15:10上).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기 힘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위대한 고백을 하였습니다(고전 15:10下). 심지어 자기를 괴롭히는 가시와 같은 안질(眼疾, 참고-갈 4:15)이 떠나기를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고후 12:7-9).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될 법한 육체의 가시가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게 하는 축복이라는 신앙관이 자족의 비결이었습니다(고후 12:10).
4. 제 10계명을 범한 자의 최후
탐심은 마음에서 일어난 작은 욕심 같으나, 실상은 행동으로 옮겨 죄를 짓고 끝장을 보고야 마는 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끝은 생명을 잃고야 마는 사망입니다(약 1:15).
(1) 대홍수 심판을 부른 끝없는 탐욕(성적 타락)
노아 때 사람들의 타락상에 대해서 창세기 6:2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성적 매력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한 아내를 두어야 하는데 여러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렇듯 노아 시대는 문란한 성생활, 은밀한 죄악에 매력을 느끼는 극도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잠 9:17, 엡 5:12).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첫째, 하나님을 근심케(아차브: 상처를 주다, 고통을 주다)했습니다(창 6:6). 둘째, 이 땅을 패괴하게 만들었습니다(창 6:11-12). 패괴(敗壞: 거스릴 패, 무너질 괴)는 ‘부서지고 무너짐’이란 뜻으로, 재생 불가능하여 아무 소망이 없는 비참한 상태를 뜻합니다. 셋째, 이 땅에 강포가 충만하게 했습니다(창 6:11, 13). 강포(强暴: 굳셀 강, 사나울 포)는 ‘완강하고 포악하고 우악스럽고 사나움’이란 뜻입니다. 너도 나도 잔혹한 폭력을 휘둘러 무분별한 살인, 강도, 폭력, 절도가 가득하여 사회질서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상황, 곧 무법 천지가 되고 말았음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넷째, 탐욕의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었습니다.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라는 하나님의 심판 선고를 받고야 말았습니다.
(2) 나봇의 포도원을 탐한 ‘아합’
북 이스라엘의 극악한 왕 아합은 나봇이 조상으로부터 유업으로 받은 포도원을 탐하다가 나봇을 모함하여 돌로 쳐 죽이고 포도원을 취했습니다(왕상 21:1-16). 이때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였습니다(왕상 21:17). 하나님께서는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라고 아합에게 전하도록 하셨습니다(왕상 21:19). 아합의 탐욕은 계속되어 길르앗 라못을 아람에게서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하고자 하였습니다(왕상 22:3-4). 하나님께서는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서 만약 아합이 전쟁에 나가면 죽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왕상 22:20-23). 그러나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고, 변장을 하고 전쟁에 나갔습니다(왕상 22:26-27, 30). 그런데 아합은 누군가 우연히 쏜 화살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려 죽고 말았고 그 흘린 피를 개들이 핥았으니, 엘리야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왕상 22:34-38).
(3) 하나님께 바친 것을 탐내어 도적질한 ‘아간’
가나안 정복 시기에 여리고 성 점령 이후 아간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 중(重)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도적질하였습니다(수 7:21). 그 결과,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보다 작은 아이성을 치러 올라갔다가 3천 명이 패하여 도망쳤습니다(수 7:2-5). 이에 패배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제비를 뽑았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습니다(수 7:14-18).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탐한 대가로 아간과 그의 아들들과 딸들은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하였고, 그의 장막을 비롯한 모든 소유도 돌로 치고 불사름을 당하였습니다(수 7:24-26).
(4) 물질의 종이 되어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돈 궤를 맡을 정도로 신임을 받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점점 돈을 탐하는 도적이 되어 궤에 넣는 돈을 훔쳐 갔습니다(요 12: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며칠 전에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에 상당하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헌신을 하였습니다(요 12:1-3). 이때 가룟 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핑계로, 마리아가 돈을 ‘허비’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주변 제자들을 선동하였습니다(마 26:7-9, 요 12:4-5). 평소 가룟 유다의 사악한 의도를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7-8). 이후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흥정하여 은 30을 받아 챙기고,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마 26:14-16, 막 14:10-11, 눅 22:3-6). 그리고 자신은 목매어 자살하였고, 그 줄이 끊어져 몸이 곤두박질하므로 배가 터져 창자가 빠져나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마 27:3-10, 행 1:16-18).
5. 제 10계명의 구속사적 교훈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제 10계명을 범하는 것과 같은 죄를 지었습니다.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하였습니다(창 3:6). 그리고 여자가 먼저 그 실과를 따먹고 아담에게 주매 아담도 먹었습니다. “보암직도 하고”(타아바 후 라에나임)는 직역하면 ‘눈에 즐거웠다’입니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타아바’는 본래 ‘욕구, 욕망, 갈망’이라는 뜻이며, ‘아바’(사모하다, 신 5:21의 내적 탐심)에 유래하였습니다(잠 19:22, 사 26:8 등). “탐스럽기도 한”(하마드, 출 20:17의 외적 탐심)은 ‘탐내다, 갈망하다, 사모하다’라는 의미로,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고 집에 두고 싶어하는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잠 21:20). “보암직도 하고‘와 ”탐스럽기도 한“이라는 표현은, 선악과를 갖고 싶어하는 여자의 내적․외적 욕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자는 올바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손을 내밀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자기가 먼저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창 3:6).
아담 부부의 탐욕은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탐욕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창 3:22-24). 십계명은,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그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사로잡혔던 그 지독한 원죄의 뿌리가 탐심에 있었음을 명쾌히 밝히면서,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십계명 즉 하나님의 ‘열 말씀’을 올바로 지키는 데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참으로 십계명은 믿는 자의 살 길입니다(레 18:5, 신 4:4-6, 32:46-47).
이 땅에는 돈(물질)의 노예, 성(性)의 노예가 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을 사랑”(딤전 6:10)하는 자들은 돈을 자기 삶의 최후 목표로 삼고, 돈만을 추구하며 돈 속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부하려 하는 자들”(딤전 6:9上)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하려 하는”의 헬라어는 ‘의도하다, 갈망하다’라는 뜻을 갖는 ‘불로마이’(bouvloma)의 현재 분사형으로, 계속해서 부자가 되려는 참욕으로 채우기에 급급한 상태를 말해 줍니다. 돈을 사모하는 자들의 최후 모습은 미혹을 받아 진리의 바른 길을 떠나게 됩니다. 처음 믿음에서 떠나 타락하게 됩니다(딤전 6:10). 많은 근심이 들어와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므로 결국 그 돈이 자기를 찔러 죽이고 맙니다(딤전 6:10下). 그러므로 우리는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딤전 6:17, 참고-잠 23:4).
성(性)에 노예가 된 자들의 정욕은 결코 끝이 없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다 점령하고 세상의 모든 남녀를 다 가진다 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베드로후서 2:14에는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정욕으로 범죄하기를 쉬지 않는 자들, 지나친 탐욕이 오래도록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자들을 가리켜 ‘저주의 자식, 진노의 자식,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엡 2:3, 살후 2:3). 정욕은 음부(陰府), 곧 지옥처럼 넓으며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릅니다(합 2:5). 모든 더러운 것을 행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엡 4:19). 그 욕심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요일 2:16).
모든 욕심은 마귀의 짓이요(요 8:44), 욕심은 죄의 근원이요, 사망의 시발점입니다(약 1:14-15). 누구나 탐욕을 품기 시작하면 마음속에 기쁨과 평강이 사라지고 불안, 초조, 미움, 절망, 좌절이 온통 마음을 점령해 버립니다. 그러나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합니다(잠 28:16下). 사도 바울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라고 아주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엡 5:3). 탐욕으로 기울어질 때에 속히 돌이켜 주의 말씀으로 향하고, 말씀에 마음을 쏟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생명을 얻는 지혜로운 길입니다(시 119:36, 잠 23:12, 전 7:12).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라는 말씀(눅 12:15)을 마음에 깊이 새김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