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떠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 (창 47:1-10, 대상 29:15)
애굽 왕 바로 앞에 선 야곱은 자신의 130년의 삶을 ‘나그네 인생’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인 (대상 29:15)에서 다윗도 주 앞에서의 인생들의 모습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많은 인물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나그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잠시 우거(寓居)하는 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 25:43) 말씀을 보면 이 땅에서의 당신의 삶을 ‘나그네 삶’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들은 이 땅에서 어떠한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1. 이 세상에서 나는 나그네요 외국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땅에서의 인간들의 삶을 “그림자같이 머무름이 없는 삶”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은 나그네요 외국인이란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25:25-43).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머리 둘 곳도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창조주 되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얼마나 푸대접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 ‘귀신의 왕’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마 12:24). 그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또한 친척들은 예수를 ‘미쳤다’ (마 3:21)고 하였으며, (눅 23:2)에서는 예수를 가리켜 ‘미혹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도 나그네로서 푸대접을 받고, 죽으신 다음에도 당신 몸 하나 묻히실 곳이 없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빌려서 장사지내는 수모를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육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분을 가리켜 사람들은 ‘붙어사는 자’ (눅 24:18)라 하였으니,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이름이 ‘나그네’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이러한 나그네를 가리켜 ‘크세노스’라 불렀습니다. 이 말은 ‘외국인’, ‘붙어사는 자’, ‘객(客)’ 등의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우리 기독 신자들에게 주어진 이름은 바로 나그네요 외국인입니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로서 40년간 지내면서 연단을 받았으며 (행 7:29), 사도 바울도 ‘염병’이라는 별명까지 얻어 가며 복음을 전하는 데에 전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살기 때문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멸시를 받으며 살지 모르지만, 우리는 영육 간 죽지 않고 변화하는 영원한 하늘나라 시민으로서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빌 3:20-21).
2. 이 세상에서 나는 순례자로서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히 11:13) 말씀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벧전 1:1)이나 (벧전 2:11) 말씀 볼 때, 베드로 기자는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을 가리켜 ‘나그네’와 ‘행인’으로 부르며, 그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나그네’의 헬라어는 ‘파레피데모스’인데 이는 ‘고향에서 쫓겨난 자’, ‘외국인’, ‘행인’ 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볼 때 이 땅에서의 성도들은 ‘나그네’라고 하는 좋지 못한 이름이 늘 붙어 다닙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 세상은 임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깨닫고 영원한 하늘 처소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합니다 (고후 4:8).
둘째, 우리 성도는 본질적으로 ‘길 가는 도중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몸은 ‘여기’라고 하는 세상에 있지만, 그 뿌리는 ‘하늘’에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장차 올 곳을 찾아 그 세계의 실존을 확신하고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순례자로서 이 세상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 땅에 마음 둘 곳이 없이, 영구한 도성을 바라보며 순례의 길을 걸어갔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히 11:8-16)
셋째, 그러니, 성도는 결코 이 세상을 경멸하거나 무시하거나 염세적으로 도피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요람’으로 알기 때문에 이 세상을 통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영광 돌릴까?”를 늘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끝으로, 우리의 나그네 여로(旅路)는 하나님께서 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분명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달려가야만 합니다.
2020년 새해를 맞이하던 감격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9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났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본향이 가까워졌다는 말도 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는 본향을 향한 순례의 여정을 위해, 놓을 것은 놓고, 붙잡을 것은 붙잡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놓고, 하나님만을 붙잡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 론
(요 14:1) 말씀을 보면,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버지 집을 향하는 순례의 여정에서 우리는 이제 막 다리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다리’. 그곳은 오직 지나가는 나그네뿐입니다. 그곳에 누가 집을 짓고 정착하며 살겠습니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 (시 144:4)고 했습니다. 남은 우리의 생애,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로서 서럽고 고통받는 삶을 살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가야 할 본향, 아버지께서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처소가 있습니다. 이를 소망하며 낙심하지 말고, 오늘도 세월을 아껴 힘차게 전진하는 순례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